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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현승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3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

직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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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개정판 이용악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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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열된 언어를 통해서 분열된 현실을 가리키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원래부터 언어는 분열되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분열의 언어는 분열의 통증을 반감시키고, 반대로 개방의 폭을 한없이 늘려 놓는다. 따라서 황려시의 시의 넓은 행간은 반복과 상관될 때조차 정밀한 초점화보다는 활달한 확산과 개진을 목표로 한다. 단어와 문장과 이미지가 촉발하는 무엇, 혹은 그 자리, 그러한 문장의 연쇄가 남긴 잔향들은 아직 완성 직전의 언어로 제공된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시의 행간이 넓다고 하여 황려시의 시가 ‘아무 말 대잔치’인 것은 아니다. 재현의 언어가 처음부터 완수할 수 없었던 몫을 투명하게 가로지르면서 다른 언어와 이미지로 끊임없이 도약하는 언어. 가장 시적인 것들은 재현이 무산된 자리에서 후발하는 착시 같은 것이라서 “데이지 꽃대를 자르면 목이” 타고(「명명식」), “귀뚜라미는 보일러 안에서 보일러가 되고”(「서로 다른 두 개를 하나로 쓰면 어떨까」), “카놀라유처럼 미끄럽게 잠꼬대를 하고 나무가 바람 대신 흔들리고”(「남자 사람 친구」) “컵은 먹물을 담은 채 골똘”하고(「몸치」), 그렇게 “시가 나를 쓴다”(「서로 다른 두 개를 하나로 쓰면 어떨까」). 황려시의 시에서 언뜻 반복적이어 보이는 일상은 분열의 언어로 비산하고, 우발과 우연은 정교한 재현의 언어로 가지런하다. 애초에 분열과 재현이, 도약과 유비가 나란하기만 하다면 이것들은 결국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신발이 수상하다」의 독화술이나 「반계탕」의 환유가 모두 저 「합」에서 보이는 골몰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는 “생각이 뼈만 남을 때까지 생각”하고 “뼈가 되어” 생각하는 것이다(「합」). 이렇게 우리는 황려시의 시들을 “명랑한 실패”라 불러도 좋겠지만(「뒤끝」), 실패의 끝에서 생각의 뼈를 만지며 더 자주 명랑할 수 있으리라.
2.
민화란 무엇인가? 반복이다. 머라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리듬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고, 생로병사고, 희로애락이다. 거기서 거기이고, 흔하디흔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리듬이다. 해학이고 말놀이다. 슬픈 사람이 술 푸고, 아네모네에 아내 몰래 눈길을 주고 “아내 안 해” 할 때는 천지가 깜깜해지는 말놀이고, 가뭇하니 조는 내게 “당신 잠 오지?” 하고 묻는 아내에게 “당신이 자모지! 나는 엄부” 하고 능청을 떠는 말놀이다. 꽃씨를 묻고는 ‘필 거지?’ 하고 묻는 말놀이다. 마냥 말놀이는 아니고, “그릇 던지요” 해서 번개처럼 놀라는데 “그라든지요” 하고 천둥소리가 따라오고, 죽은 국화가 주권 국가가 되는, 댓잎에 비 오는 소리가 되는 서글픈 말놀이다. 그러다 문득, 댓잎에 비 오는 소리? 좋은데! 하면서 행간에 오래 잠겨 있게 되는, 민화는 말 그림이다. 그 말 그림 안에서는 일(의 순서와 경중과 복잡을 외며)도 놀이가 된다. 한 손은 카누 양손은 카약 하며 분별하고, 두루치기는 끓이는 것, 제육볶음은 볶는 것, 주물럭은 굽는 것 하며 민화는 가르치고 깨닫는 천지현황 기억의 말이다. 일단 놀고 놀다 보면 죽도 되고 밥도 되는 생활의 말이다. 창원소방서 맞은편 밀면집 사훈처럼 길을 내고 문을 여는 말이다. 원래는 없던 공간인데 불안은 불의 안, 하면 열리는 펄펄 끓는 상상력이고, 말의 주문이라서 거기가 달팽이 뿔 속이든 물 없는 바다 사막이든 시끄럽게 떠드는 나무의 입이든 반드시 한번은 그 말을 따라갔다 온다. 사람이 먹어 치운 술병들이 급기야 사람을 먹어 치운 뒤 부는 괴괴한 휘파람을 들려주고, 작은 옹기에 기어이 큰 옹기를 담으려는 옹기장수의 억지를 비아냥대는 듯 경원하고, 펄펄 눈이 내려 가난이 가난을 덮는 징글(벨) 징글(벨)한 시절에도 산타클로스 같은 군밤장수가 있어 따뜻했던 한때의 기억을 사금파리처럼 만지작거리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점차로 눈이 흐려지고 무릎이 아파 내려설 계단 한 층을 연옥에서 지옥 보듯 하지만, 그의 시선에서 세상사는 더 깊숙한 그림이 되었다. 힘주거나 우기지 않으면서도 세상사가 다 그냥은 없고 천지간이 다 연비간임을 말하는 그가, 웃고 있는데 눈이 젖은, 그가 시인 성선경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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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선의 이 시집은 인생의 잔등에 걸린 배낭과 같다. 잦은 이동은 결국 그 주머니를 최대한 간소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 여행자의 최소주의는 시의 최소주의와 만난다. 그러나 짐을 싸는 일이 여행의 전부가 아니다. 여행이란 벅찬 감격과의 조우만큼이나 피곤과 눈물이 따르고, 불안을 길앞잡이로 삼아야 하는 일이다. 남궁선의 첫 시집을 설명하는 두 명명―‘괄호의 수사학’과 ‘눌변의 경험담’은 여행자 수첩의 기록 방식을 보여 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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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피어도 되겠습니까]를 어디서부터 읽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집 제목과 같은 제목의 시를 찾거나 아무 데나 펼쳐랏, 하지 말고 「서과투서」부터 보기 바란다. 거기에는 팔순의 겸재가 보는 담박하고 넉넉한 세계가 있고, 그걸 염화미소 하는 시인이 있고, 무엇보다 쥐와, 겸재와, 시인이 ‘우주의 한쪽을 갉작이는’ 천진한 모습이 시원한 수박의 맛으로 펼쳐진다. 진경이다. 단연코 한영수의 쥐 두 마리가 겸재의 것보다 생생하게 그려져 있을 것이다. 저 ‘갉작임’의 질감 속에 다 들어 있다. 이제 시 읽을 맛이 생겨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시인이 두 번이나 공을 들여서 완성한 「이름」을 보자. 너른 바다를 향해 흘러갈 때는 몰랐던 강물의 유전이 돌아보면 이리도 굽이굽이 구부러져 있다. 사랑에 이끌리고 인정에 울고 써럭초와 탁주발에 맥을 놓았던 한 사람이, 비스듬한 웃음으로 이름도 없이 생을 건너가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유순이’의 삶으로부터 몇 걸음 더 갈 수 있을 것인가. 사소한 꽃말에도 오래 마음을 주고, 대체로 마음을 주는 일에 소명을 걸고 있는 시인에게 왜냐고 묻지 말자. 산 밑에 사는 아이가 징검다리를 건너야 학교를 가는데, 하늘을 뒤덮는 비구름을 보고 걸음이 바빠지는 것처럼 이 삶은 같은 길도 더 성의껏 건너야 하는 생이 있었던 것이다.(「조용한 사람」) 거기에 체온보다 높은 공기 속에서 오 층 계단으로 배달품을 올리는 어느 택배회사의 시시포스가(「고독이 온다」), 세상은 잠들었는데 세상을 돌리다가 발전기로 끌려들어 간 김용균이(「비극이 이름을 얻을 때」), 자신은 최소한으로 먹고 자면서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김밥 할머니가(「김밥 할머니」), 그리고 가진 것이 없어서 꿈에 더 많이 개방되었던 신접살림을 산 시인의 한 시절이(「유르트」)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느 방향으로 읽어 나가든 거기에는 제 생을 온몸으로 살아 내는 존재들의 소리 없는 울음과 웃음이 있다. 그의 정신이 소월과 닿고 백석과 함께하고, 고흐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이 삶을 완성하는 것은 예술이기 때문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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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必)’은 ‘반드시’, ‘기필코’, ‘틀림없이’라는 뜻이고, “평생 심장에 꽂힌 칼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심장에 꽂힌 칼”이라니, 그것은 필시 ‘회한’의 한 형상일 듯하다. 물그릇을 들고 자빠진 사람처럼 후회란 두 가지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엎질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책망감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몇 번이고 다시 엎지르게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반복과 지속은 회한의 방법이자 목표다. ‘대화공원 앞 삼사 차선에 로드킬된 고양이’부터 ‘뱀눈박각시나방을 떠메고 가는 개미’까지, ‘떨어져 터진 살구 알’에서 ‘십육 년을 함께 살다 죽은 개’까지 죽음은 시집 도처에서 나타나고 반복된다. 죽음이 편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각각의 죽음이 회한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저녁의 어스름이나 끝도 없이 내리는 비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죽음과 저녁과 비의 영원회귀가 새겨 놓은 회한의 형상이 ‘필(必)’이다. 회한 속에서 완수하지 못한 혁명과 연애와 무수한 생사고락이 ‘자기’를 벗고 다시 태어난다. 여름이 여름을 벗고, 참나무가 참나무를, 그늘이 그늘을, 붉은괭이밥이 붉은괭이밥을 벗고, ‘자기’가 되려 한다. 이 회한은 단지 지난 시간의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생되는 기억이기에 “生前과 死前은 같은 말이다”. 그래서 구 년은 하루 같고, 십사 년 동안 강릉엔 비가 내리고, 사월의 비는 오월까지 내리며, 이십일 년 전 삼양교회 중등부는 크리스마스캐럴을 아직까지 부르고, 스물여덟 해 전의 그 사람은 여태 차비가 없다. 같은 이유로 그는 “깨지 않는 꿈”속에서 찢긴 깃발을 부여잡고 서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오늘 내리는 비가 오로지 비 오는 오늘을 완성’해 가듯이 ‘스스로 그러한’ 자재함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로 한 문장(세계)을 완성해 놓았다. 거기에는 살이 녹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도 붙들어야 할 이유가 있고, 그 세계는 마치 세상을 버린 사람의 노래처럼 가없이 슬프고 처연하게 가라앉는다. ‘틀림없이’ 아름답고 ‘마침내’ 아프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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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별거냐. 월촌댁의 김 씨가 농약을 소주병에 털어 넣고 세상 버린 저녁처럼 더 깊은 쪽으로 더 짙은 어둠이 고이는 것일 뿐(「죽음의 기록」), 사랑을 잃고 그 기억의 자리를 맴도는 사내와 그의 개처럼(「존재를 켜 두고 있는 중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랑은 멈출 수가 없다. 뼈와 살과 피와 숨이 사랑의 근원이라면 이 열정의 기원은 내 몸이 아니어서 신병 같고 무병 같다. 다른 존재의 감각과 숨결과 넋과 기분에 가닿는 접신술이 몸과 정신을 바꾸는 연애학이다. 유명한 영화의 대사처럼 이 병에는 처방전이 있지만, 허망한 것은 반드시 병이나 숙주 양자 중 하나가 먼저 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을 이어 나가는 일을 ‘존재를 켜두는 일’이라고 썼나 보다. 바람막이 없이 초를 옮기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어서. 한생이 결국 그렇게 건너는 일이고, 지나고 보면 추억이란 반드시 따뜻한 것이어서 그리운 것만도 아니다(「에인다는 것」). 죽은 남편을 따라갈 독한 마음을 먹었던 엄마가 쓰디쓴 ‘장미’를 세 번에 나눠 피우면서 견디는 것이 사랑이고 삶이었듯이(「엄마와 장미」), 아비와 딸이 함께 걷던 양양한 한때가 있는가 하면(「뻘뻘」) 돌아간 사람을 두고 꼭 한 번만 안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미어지는 한때가 있다(「그 남자」). 이렇게 만상이 이 열병의 때를 지나고 지나서 소사동 팽나무처럼 잎 다 내려놓고 서게 되는 것이리라. 암세포처럼 곰팡이로 칠갑을 하면서 뒹구는 빈집 같은 삶의 한때가 있고(「곰팡이」), 눈앞의 벼랑을 무섭게 응시하면서 비를 맞는 새에게 삼투되는 생의 한때가 있는 것이다(「저, 새」).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 마음의 폭풍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풍경을 갖게 되는 것이다. 들판을 건너는 바람의 걸음이 보이는 것이다. 그때쯤, 어떤 어둠은 심연처럼 깊어서 시간도 멈출 것 같은 그때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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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화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다. 물론 다정의 연원은 다감이지만 이 태생적 다감은 세계의 폭력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점에서, 이세화 시의 언어와 감정은 거의 모두 비대칭이다. “혓바닥 위로 이가 가득 자라는 꿈”을 꾸거나(「물감」) “수백 마리의 들개가/폭포가 되는 광경”(「환생」)에서처럼 비대칭은 사실성을 뛰어넘는 경험과 감정의 범람을 통해 목격되기도 하고,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토할 것 같아”라거나(「춘곤증」) “하늘이 유난히 높아서/꽃과 탈진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오늘의 풍경」)와 같이 대상 세계와 경험 주체의 불균형과 부조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은 육체와 정신의 세포분열이 최고 속도로 진행되는 성장기에 자주 겪는 공포와 소외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아이러니의 언어들이 잉태되는 가장 첨예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은/사랑한 적 없는 우리가 헤어지는 날//당신이 떠나간 자리에서/얼굴 없는 아이가 노래하네”(「플라스틱 러브」)에서 보듯 아이러니는 지독한 사랑의 깊이로부터 만들어진다. “허물어지는 마음이 어디론가 흐르듯”(「10월」) 온종일 울고 난 뒤의 눈이 더듬는 어두운 세계의 풍경처럼, 이세화의 시에서 사랑의 깊이란 언제나 감각의 깊이다. 아픈 사람이 잠시 단잠을 자고 일어나 보는 풍경처럼 다정함은 다정함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나란한 비대칭. 다정해서 아픈가, 아파서 다정한가. 잠들기 바로 직전이 먼 전생처럼 느껴지는 이 사랑과 상처의 깊이 위에서(“자고 일어나면 새로 태어난다는 이야기”, 「편지」) 풍경과 마음은 이세화의 시에 각인된다. ‘사람의 손등 위에서 도마뱀이 입는 화상’처럼(「처음으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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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여기 이 가련한 소녀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면, 문학은 정의로운 것이다. 한 오래되고 아픈 여인의 옛날이 지금 여기에서 노래가 된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미래가 있을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옛날조차 하나의 비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에는 언제나 다음이 있다. 제 외로움의 아픔 속으로 자맥질해 가서 거기서 더듬더듬 한 조각의 미래가 명멸하는 것을 보는 그 전율의 순간에 시가 있었다면, 그는 이후로 풍파와 공허와 이토록 을씨년스럽고 비루한 고독을 견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한 줄기의 환상에 기대어 ‘세포 속에 자신만의 방을 만들고’(「소녀와 과학실」), 연애를 구걸하고(「우리는 태초에 꽃의 이름으로 태어나」), 그리고 응답 없는 침묵과 광기 어린 고독 속에 자신을 더욱 맹목적으로 기투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리라. 그러한 이유는 오직 시만이 그에게 고드름 같은 휴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 외로움 속에서 다른 외로움을 마주쳐야만 하는 것이 고드름이지만 고드름이라는 한 형식이 또한 하나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드름」). 불행조차 존재의 거푸집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얼어붙은 눈물의 결정이면서 다른 눈물의 젖줄을 대는 ‘고드름’이 또한 박송이이며 박송이의 시이다. 어미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동시에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저 「회전목마」 속의 삶처럼 말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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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의 시적 지향은 “새롭게 어리석게”(「몽돌」)이다. 새로움이 그녀가 무수한 생각과 생각과 생각과 생각을 生覺시키면서 얻고자 하는 지고한 목표지만 “새로움은 ‘이미’에게 포위”(「굿모닝 천 년」)되어 있을 뿐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어리석음에서만 건널 수 있는 피안이다. 어리석음이란 지혜를 가까이 하려는 자의 항상적 태도이다. 바보를 자처하는 자들을 보라. 그 형상은 저 장자의 산목(山木)처럼 굽어 있다. 그리고 그 굽음은 마치 뜨거운 불판 위를 지나가는 환형동물의 “과잉곡선”(「과잉곡선」)을 닮았다. 정숙자의 시들은 철학적 높이로 들려져 있지 않다. 철학적 깊이로 고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철학적 높이란 바로 “오른발이 타 버리기 전/왼발을 내딛고”(「살아남은 니체들」) 가야 하는 뜨거운 보행으로 바꾸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인칭이란 얼마나 “고독한 공간”(「인칭 공간」)인가. 집중된 상승과 도약이 한 계단이라면, 추락과 활강이 다음 순간의 계단이다. 이 ‘뒤엉킨 시간’을 견뎌 내는 것. 천년, 만년을 두고 조금씩 견디는 것이 그녀의 실천이성이며, 바로 이 ‘승화’를 위해서 그녀가 “책장에 가득 꽂힌 나비들”(「일단 이것을 나비라고 부른다」)과 함께 “신들이 켜 놓은 등불”인 꽃을 피울 “피의 승화”(「꽃 속의 너트」)를 감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숙자는 시의 수도자요 고행자이다. 시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기쁨과 동시에, 그 한 줌과 맞바꾸기 위한 엄청나게 불합리한 기다림을 견디는 고행의 “발자국만으로 족히 마을을 이룬 한 그루”(「각자시대」)의 시인이고자 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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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야생으로 역행하는 삶 속에서는 모든 삶이 그저 뜨거운 유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파괴는 생산과 같아지기도 한다.(「칼데라」) 「시립무등도서관과 이스탄불무인텔 사이」란 뜨거운 역사와 비루한 현실의 사이이며, 높은 정신의 문명과 비린 육체의 사이다. 그곳에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투계를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질컥거리는’ 사람들(「투계」)이 있고, 배달 요금보다 높은 범칙금을 물면서 마네킹을 배달하는 퀵서비스맨이 있다. 문명 속에서 우리는 기껏 “지하철 계단 편의점 매장 사거리 신호등 여자화장실 목욕탕 탈의실 물고기 같은 눈으로 침을”(「몰카 천국」) 삼키는 카메라의 먹잇감밖에 안 된다. 다시 묻자. 사는 게 뭔가? 고성만 시인은 남자와 여자를 불러와 거기 기꺼이 한 살림 차린다.(「천전리 각석」) 그러면 어느새 ‘밥 짓는 김이 오르고’, 등에 뜨끈하게 지져지는 열기를 참으며 한 생을 건너가는 것이다. “나는 노를 젓고 너는 아이 업은 채 밥을 짓고”(「양화진」) 하면서. “민들레 갓털처럼” 분주히 오간 이 원족의 흔적들. “살아본 것 같은 집들, 만나본 것 같은 사람들”(「전주」), 생각해보면 사는 일이 “투신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송이의 글썽글썽한 눈”(「옥상」)을 보는 일 같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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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균원의 시는 이후(以後)의 시이다. “십일월의 등짝을 지켜보는” 시이다. “가지 않은 길이 지나온 길보다 먼”(「십일월의 등짝」) 삶, 그것은 “첫아이의 볼에 난 화상” 흉터 같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구축된 삶이다(「달빛 흉터」). 새로움을 향한 모든 입구가 바로 ‘기억을 통과한 자리’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후가 없는 이전은 없다. 이후란 새로움이 움트는 자리다. 후회나 예감 어느 쪽이든 성급하기 십상인 시의 감성에서 이후의 시란 일탈보다는 내파를, 미래적 비관/낙관보다는 현실적 비판에 제 지분을 둔다. 그가 구사하는 잔잔한 유머와 재치들을 보라. 이 극세필의 묘사들에서는 일상사조차 십만분의 일초로 미시화되어 또다른 초현실의 풍경을 내놓는다. 아이러니를 제 시의 구축원리로 삼는 시인답게, 그는 야단스럽게 새로움을 쫓지 않으며, 쉽사리 사물과 감정에 투신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만큼 사물이 가장 잘 보이는 거리에 대한 고심과 부심이 있다. 그는“허기가 깊으면 퍼 올린 국물이 넘치기 마련(「천국식당」)”인 “세상의 언저리(「세상의 언저리에 머무는 것을」)” 어디쯤에서 하명을 기다리는 시종처럼 몽당 연필 한 자루의 형세로 기껍다(「뮤즈의 계단」). 그런 만큼 그의 웃음은 헤프지 않고 그의 다정은 잘 벼려져 있으며, 슬픔조차 단정한 생활의 옷을 입고 있다. 그만큼 진실하다. 떠들썩 갑작스레 좋지는 않지만, 오래 향기를 잃지 않는 힘이 있다. 나는 이런 시가 주는 중독을 양균원 효과라고 불러보고 싶다.
12.
  •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하린의 시는 곤경과 참경의 한 극점에 닿아 있다. 흔히 이 난경과 참혹의 이유는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시비와 가부가 진실을 파헤쳐보았으나 종내는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는 삶이란 “혼자 하는 연극”처럼 역할에 갇힌 삶이다. ‘서민’이 출신계급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종신계급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비루한 진실의 역할극을 되풀이해야 하는 나는 “방치된 유전자”(';트럭')에 지나지 않는다. “흔해 빠진 자살”과 “낡아 빠진 코러스”('소포클레스 극장')란 비루한 세계가 뻔히 알면서도 자기를 기만하기 위한 클리셰들이다. 오히려 “달을 향해 포자를 밀어올린 곰팡이”야말로 리얼한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극빈 제조 기술에 대해 하린의 주체들이 독설과 요설을 비트박스로 질러대거나, 변종과 잡종에 대해 옹호적인 것은 당연하다. 부정과 야성에 대한 편향은 이렇게 얼개를 이루고 촌철살인의 발톱을 세운다. 세계의 야만성과 포식성에 대한 하나의 진화로서 말이다. 이 말들은 이제 송곳니가 되고자 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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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매혹이 곧 미혹이라는 것을 안다. 전복이 키워 낸 진주처럼 이 매혹이란 실상은 종양 같은 것이다(「미혹, 혹은」). 좁쌀보다 작은 그것이 어떻게 숙주를 먹어 치웠는가. 전전반측, 살아 낸 삶 앞에서조차 타는 듯 “잠은 졸아들고/ 미간”은 좁아진다. 궁구하고 골몰하는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 기꺼이 미혹의 아가리로 뛰어든다. 쓰는 일과 사는 일이, 사는 일과 생각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 생각이 밥이고, 밥이 곧 삶인 것이다(「하안거」). 이정원의 시는, 과거 시제의 구체적 사건이 현재 시제의 보편적 본질에 이르는 시학의 전통에 서 있다. 이법에 가닿으려는 요량이 바람의 경을 듣게 하고, 바람의 말을 받아 적듯 허망한 쓰기에 매달렸기에 적막의 상감기법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비색에 들다」). 노을이 낙관을 뜬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의 감상이 아니다. 당연히 거기엔 보는 사람의 고심이 포함되어 있다. 마음을 다그치고 골몰하여 아픈 미혹을 천만 번 되풀이하여야만, “꽃의 겨를”에 ‘드는’ 것이다(「꽃의 겨를」).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의 시 쓰기가 저 ‘들다’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말하자면, 전 생애를 ‘추호’에 집약하여 그녀가 여기 들었다.
14.
  •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너무나 분명했던 인생의 세부들이 너무나 불분명한 인생의 전체에 의해 까마득히 지워져 버리는 것을 보면, 이렇듯 다단한 상처의 편린들은 각오로 새기고, 저주로 칠갑을 하지 않으면 붙들 수조차 없는 세목들이리라. 속죄가 새롭다 하겠는가? 무속이 낯설다고 하겠는가? 염원과 저주가 다른 이름이되 한 몸인 것처럼, 전형철의 시는 저주를 견디고 염원을 살고자 한다. 이물들의 교호와 죄의 경신과 함께. 그렇다고 그의 시에서 이물과 죄와 저주와 염원만을 본다면 이는 잘못이다. 사진의 마지막 피사체는 웃고 있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다른 얼굴이며 그러므로 칠갑을 한 언어들 저편으로 물러나 앉는 것은 시를 쓰는 자의 마지막 미덕이다. 시와 세상과 시인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방법은 이것뿐이다. 저 검은 칠 너머를 보는 것.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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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의 윤리학이 가진 최대 약점은 너무 결백한 주체가 상상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찢어지기 위해 포장된 비닐처럼 그렇게 피해자라는 의식과 관념을 드리운다. 그러나 사건은 이런 단순한 구도와 한도를 가볍게 넘어선 위치에서 매번 고유하게 발생한다. 결백하고 섬약한 주체는 삶의 얼룩들을 여과 없이 잘 보여 주지만, 문제는 삶 자체가 얼룩이라는 데 있다. 사체를 순식간에 흙으로 되돌리고 바로 그 자리에 무섭도록 싱그러운 풀을 자라게 하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는 오직 고통만이 이 사건의 유일한 최후의 증거가 된다. 정다운의 시는 “빨갛게 무쳐진” 언어들로 요리와 살인의 장면을 포개고, 두려움과 공격성을 한 몸으로 삼아 상처와 폭력을 마주 세운다. 때리면서 맞고, 맞으면서 이미 때리고 있는 고통의 윤리학은 ‘벽을 향해 노랗게 달려드는 토마토’나 ‘최대한 부풀린 복어’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일촉즉발의 반대편에서는 더 이상 물어뜯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손가락처럼 기형적으로 피를 흘리는 삶이 놓여 있다. 정다운의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한도 초과’는 그 넘침의 자리가 고통의 자리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실존의 고통이 삶의 깊이로 변환되는 임계점에 그녀의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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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1월 19일 출고 
혁명은 끝났는가. 신념의 빛이 사라진 자리에 비루와 누추와 폐허가 밀려든다. 거기 한 주검이(개개비 새끼) 한 식욕으로(가시개미들) 남는 자리, 그곳은 저녁이고, 호수공원이고, 스카라극장 앞이고, 천상별쌍선녀집과 그 옆 단란주점 물망초 사이 스물두 개의 계단이고, 불광천변이며 화정역 근처 벌집삼겹살집이다. 죽음이 개그콘서트처럼 반복(재방송)되는 자리에서 채상우는 치열을 느낌이자 방법론으로 삼아 근원 추적의 서사를 쓴다. 채상우의 두 번째 시집 [리튬]은 파편화된 삶, ‘편안하게 죽어’ 있는 삶을 이어 붙이고, 어루만져 그 기억의 편린들을 원래의 자리로 환원시킨다. 죽었던 것이 되살아오는 자리는 살았던 것이 되죽는 자리이기도 해서 삶은 조증과 울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마치 풍문과 점성술과 천문학과 역술의 실재적 감정과 같아서 ‘느슨과 나른과 몽롱’이 ‘긴장과 전율과 섬광’으로 솟구친다. 벤야민적 꼴라주가 채상우 시의 외피라면 당연히 그 내피는 멜랑콜리이다. 비루함과 무미함, 건조함만이 이 내세 같은 일상에서 견뎌야 할 세목이더라도, 순정을 잃어버린 혁명 이후가 다만 숙청 중이더라도, 삶은 다시 제 식욕으로 부끄러움 없이 이렇게 솟구친다. 그가 무심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을 즉각적으로 언어화할 때마다 거기에는 모래 폭풍 같은 파토스가 끼어든다. 혁명은 끝났는가. 아니다. 누추를 찢고 나오는 자리가 원래 혁명의 자리이다. “헤아릴 길 없는 극명”으로, “제 生의 시각”으로 거기 혁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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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자의 시편들은 ‘무시무시한 비장감’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단아한 표면’으로 ‘힘과 긴장의 시학’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자기 자신을 정지 비행 중인 헬리콥터(<호버링>)나 분출과 낙하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찰나의 물줄기(<분수의 방식>)라고 자각하는 자의 내면적 실재를. 상처의 진원지는 ‘그때 거기’지만, 언제라도 그것은 갈라져 솟구쳐 올라온다. ‘지금 이곳’의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놀랍도록 균형 잡히고 정제된 표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분출하는 슬픔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의 부드러운 음색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삶이 탬버린처럼 요란 경쾌하게 울리다가도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제 입을 틀어막은 저 손을 적시는 눈물이 그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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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 시인은 의미화되기 전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이다. 그림이 되기 전의 풍경이 되려는 사람이다. 그는 소금 알갱이가 되어 소금밭에 누워 있거나 바람줄기가 되어 낙양에 낯을 쪼인다. 백 년째 그렇다. 그가 애써 만나고 마음을 다하여 머무르는 이 자연은 사물 이전의 사물의 이데아로서의 자연이고, 상처 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터득되는 이치 같은 것을 손에 쥔 자의 침묵 같은 공간이다. 그의 시가 자연을 닮아 반듯한 것은, 어쩌면 자연이 낯설어서 자연이 아닌 것처럼 새로움을 더 안쪽의 어둡고 깊은 곳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풍진 세상살이가 언제나 자연을 돋아 보이게 하는 돋보기라는 것을, 그래서 자연이 있는 그대로 인간사를 되비출 때 가장 빛난다는 것을 그의 시는 웅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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