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0년대 말엽부터 한국고대사 관련 논문을 썼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자료를 주워섬기며 다른 이들의 견해를 비판한 뒤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는 데에서 뭔가 뿌듯함을 느꼈다. 예리한 설명 논리로 토론을 압도하는 모습이 큰 연구자의 풍모라고 생각했다. 흉내 내기에 바빴으므로 이것저것 열심히 읽었으나 정말 좋은 논문, 좋은 책은 잘 가려내지 못했다. 그저 이리저리 남의 생각과 유행을 바삐 좇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비수처럼, 표창처럼 예리한 글을 추구하였다. 글에 공명심이 가득 찼다.
그 시절 나는 이기백·이기동의 『한국사강좌-고대편-』(일조각, 1982)을 많이 읽었다. 한국고대사에서 고고학의 역할과 비중이 아직 크지 않던 시절, 언어학·인류학과 연계한 역사연구방식이 더 유행하던 시절에 간행된 책이었다. 그런데 이내 유적 발굴조사와 고고학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과거와 다른 지식, 연구방법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고대사관련 학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상고사학회, 한국고대학회, 고구려발해학회, 백제학회, 신라사학회, 한국목간학회, 한국고대사탐구학회, 중부고고학회 등 새로 생긴 학회를 통해 새로운 견해가 쏟아졌다. 정설이 하나 둘 바뀌었다. 그러나 새로운 한국고대사 개설서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30여 년 만에 노태돈의 『한국고대사』(경세원, 2014)가 정
년기념으로 간행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역사·고고학계가 양적으로 팽창한 데에는 한국학술진흥재단(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이 주효했다. 그런데 학자들이 어느덧 재단의 평가기준인 등재학술지 게재 논수, 논문인용지수 등에 매달리면서 부작용도 생겼다. 그저 그렇고 비슷비슷한 논문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학설은 오직 과학적 논리와 근거에 따를 뿐 다수결 투표로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통념이 무색해지기도 한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논문 50여 편과 책 몇 권을 발표하였다. 작업을 끝내고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한 적도 가끔 있었지만, 돌아보면 나의 오만이 빚어낸 착각이라고 자조하며 탄식하게 되는 상황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동안 좋은 글을 많이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옹졸한 글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은 스스로 가상히 여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책을 낸다. 대학에서 차분히 연구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번잡한 박물관에서 바삐 일해야 했기에 그동안 한국고대사 개설은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해왔지만, 근래 유사역사학의 움직임과 영향력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사료를 최대한 그대로 번역해 소개하고, 학계의 연구현황을 최대한 건조하게 많이 소개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려 노력했다. 다만, 논문은 이름을 알리거나 점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탐구해 밝혀내고 공유하기 위한 것이므로 누가 썼는지를 밝히는 일은 생략하고 주요 논지만 소개하였다.
이 작은 책이 향후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분석을 겸비한 한국고대사 개설서가 많이 간행되는 마중물이길 바란다. 한동안 현미경에 눈을 고정하고 몰두하느라 망원경을 잊고 지낸 것은 아닌지 자문했는데, 글을 쓰면서 많은 연구자가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성과를 이룩해왔다는 사실을 종종 실감하였다. 이 책의 학문적 기반을 만들어주신 수많은 연구자께 한없는 존경심으로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