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나오고,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1999년 「조선왕조 왕실가례용 공예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문화재청과 국림문화재연구소의 상근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종묘제례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을 하면서 「朝鮮後期 凶禮‘都監’의 匠人硏究」를 비롯하여 2001년 「조선후기 왕실의 옥공예 장인 연구」를 썼다. 2003년부터 한서대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조선 왕릉의 정자각과 석의물 등을 제작한 장인을 밝힌 「朝鮮後期 山陵都監의 匠人硏究」(2007)은 한국연구재단의 우수학술논문으로 선정되었다. 곧이어 북한과 교류를 통해 『고려왕릉』(2008)을 발간하면서 북한의 개성에 있는 신의왕후 제릉이나 정종 후릉 및 함흥 등지의 북도 팔릉에 대한 성과를 냈다. 조선왕실의 국장이나 왕릉 및 종묘에 필요한 의장의물을 제작한 각종 장인을 연구하여 『조선왕실의 궁릉의물 연구』(2013)을 썼고, 규장각과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에 기록된 장인을 정리한 『의궤 속 조선의 장인』은 인천문화재단의 2013년 우현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왕릉』(2019), 『국장과 왕릉』(2022), 『중국황제릉』(2023) 등을 꾸준히 책자로 발간하고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이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소장이다. 국사편찬위원이며, 문화관광부의 영정초상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수리기술위원이자 무형문화재전문위원이며,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및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위원이다.
조선 왕릉(王陵)은 나에겐 어릴 적 즐거운 추억이 많은 곳이다. - (중략) -
어릴 적부터 나는 우리 역사나 세계사를 좋아했고 잘했고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조선왕릉은 소풍으로 친숙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천마총이 발굴된 직후라서 경주의 신라왕릉에 가서 그 규모와 찬란한 금빛 유물에 감동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들어가서 공예에 몰입하면서 왕릉은 잠시 잊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왕릉은 다시 내 관심 안으로 들어왔다. 우연인지 대학원의 첫 수업은 김리나 교수님의 한국조각사였는데, 같은 수업을 듣던 조각과 대학원생들이 조선왕릉의 석인상을 발표할 때 어릴 적 조선왕릉을 기억해내며 그들의 발표에 공감하였다.
석사학위를 마친 1989년 8월, 수교 전 중국의 초청을 받아 장춘과 백두산 그리고 베이징을 갈 기회가 있었으며 이때 명나라 황제릉에 해당되는 명13릉을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중국 황제릉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1992년 수교 이후 1994년 입학하여 1995년 박사과정을 다니던 중 김리나 교수님의 수업을 ‘고려시대’로 정하였고 같이 수업을 듣던 정은우선배(현 동아대 명예교수)는 고려시대 불교조각을, 이종민후배(현 충북대 교수)는 고려시대 청자와 상감청자를, 나는 고려시대 왕릉을 조사하여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고려왕릉을 주제로 삼았지만 실제 그곳을 가볼 기회가 없었기에 심도 있게 접근하기 어려워 내심 아쉬웠다. 박사논문의 주제로 조선왕실의 오례 중 하나로 조성한 조선왕릉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기에 그것의 원형에 해당되는 고려왕릉은 미완의 연구주제로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박사과정 내내 국혼과 국장을 함께 조사하였지만 최종적으로 박사학위논문은 로 국혼에 집중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국장 때 조성한 조선왕릉에 미련이 남아 오래 묵은 숙제처럼 계속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미완의 과제였던 고려왕릉에 대해 계속 관심을 표방하였는데, 예맥출판사를 운영하던 유성웅선배가 여러 경로로 북한과 교섭하여 2004년부터 몇 차례 북한을 함께 방문할 기회를 성사시켰고, 그들과 남북교류를 통해 수천 장의 사진과 도면 및 야장 등을 확보하여 2008년 『고려왕릉』(예맥)이란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아직도 그때 수집하고 모은 고려왕릉 전체의 도면과 사진 자료 등을 10년 넘게 묵히면서 종합적인 보고서로 풀어낼 기회만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에 조선왕릉과 관련된 논문이 여러 편 쌓였고, 기존 논문을 다시 풀어쓰고 자료를 보완하여 2019년 『조선 왕릉』(솔과학), 2022년 『국장과 왕릉』(현암사)을 계속 펴냈다.
이와 같이 박사과정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고려왕릉이나 조선왕릉을 연구하였지만, 그와 함께 우리의 왕릉에 영향을 주었던 중국의 황제릉 또한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중국 황제릉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제법 연륜이 있다. 1989년 당시 국교도 없던 때에 중국에 들어가 베이징의 명13릉을 보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그 당시 한국인 중 그곳에 갔던 이가 누가 있을까 싶다. 이후 1994년에는 홍익대학교의 학부를 다닐 때 한국미술사를 강의해 주셨던 안귀숙선생님(문화재감정관)과 공예과의 동기동창인 안명선박사와 함께 2주일간 시안(西安)이나 공현(鞏縣) 등 중국의 여러 곳을 답사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비롯하여 당 소릉(昭陵)이나 건릉(乾陵)을 보았는데, 그때 그 느낌은 감동을 넘어 하나의 전율이다. 당시에는 안선생님이 관심을 가진 불교조각이나 불교공예가 많은 사찰이나 석굴 등이 주요 답사지였지만, 내 스스로는 가끔씩 들른 황제릉이 훨씬 흥미로웠다. 이에 서점 등을 뒤져도 당시 중국인들은 황제릉을 연구하거나 관심도 많지 않아 불교 분야보다 자료가 충분치 못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2000년 문화재청에 근무할 때 조선왕릉을 본격적으로 정리하면서 중국황제릉을 정리해보자는 꿈도 함께 꾸었다. 곧 이어 2003년 한서대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방학 때마다 중국의 황제릉이 있는 곳을 다 찾아가 현지 답사를 먼저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내공을 쌓으면서 『중국황제릉』이란 책을 써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금방 밝혀졌다. 지금부터 2-30여 년 전 중국은 참 다니기 어려운 곳이었다. 베이징이나 난징, 시안 등 대도시 이외에 지방이나 시골은 포장되지 않은 도로로 인해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비가 오면 진창길에 도로가 쿨렁쿨렁하고 물이 고여 바퀴가 빠져 나오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황제릉은 택시를 대절해서 가더라도 물어 물어 찾아 헤매는 일이 다반사이고 이정표도 없어 여행이 아니라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부터 한서대학교에서의 20년간 나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거의 언제나 중국 황제릉과 함께였다고 자부한다.
미술사 전공자인 나는 글을 쓰기 전에 반드시 실물을 실제로 직접 보아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문헌 연구와 발굴보고서 등의 학술적 연구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국 황제릉을 모두 가 본 후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실전에 부딪혀 보니 망망대해에 홀로 표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 역사는 너무 방대하다. 상나라 이래 61개 왕조가 있었고 황제만도 341명이나 되며 여기에 황후나 비빈, 왕자까지 합치면 수 천명의 황족이 살았다. 그래서 범위를 좁혀 중요한 황제의 황제릉을 고르고 그 중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황제릉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황폐하여 볼 것이 없더라도 우리와 관계가 깊고 유명했던 한무제, 수양제, 야율아보기, 아구타 등의 능도 대상에 넣었다.
또한 중국 역사상 문헌이 확실한 상나라부터 시작하여 청나라까지 무려 3500여 년의 역사를 꿰뚫어 봐야하고 수많은 문헌과 서적을 읽어야 하는 학문적 바탕도 닦아야 했다. 실제로 30년간 중국 여행에서 방방곡곡의 박물관과 서점을 다니며 300여 권 이상의 서적을 구입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그 서적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현지에 위치한 황제릉의 실물을 보고 느낀 내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 사이 중국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오늘날 중국 황제릉을 답사하기는 옛날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베이징의 명13릉이나 선양의 소릉, 복릉 그리고 난징의 명효릉 정도는 단체관광객이 몰릴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30년 전 중국 황제릉을 답사를 시작할 때에는 어느 곳의 황제릉 하나에도 이정표나 표지판이 없었다. 영하 30도가 되는 한 겨울에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펑펑 내리던 북만주에서 금황제릉을 찾아 헤맬 때에 어렵사리 그 위치는 파악했으나 눈에 덮여 도로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그 마을에 사는 촌로를 함께 택시에 태우고 현장까지 가서 쌓인 눈을 털어내며 실측하고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의 황제릉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쉽지 않다. 어떤 때는 동리에 택시도 없어 산골을 온종일 걸어 헤매기도 했다. 요나라의 태조 아구타 황제릉을 찾아갈 때에는 내몽고의 길도 없는 산야를 헤매다가 그곳을 안다는 시골 아주머니를 납치하다시피 모시고 가서 확인하기도 했다. 육조시대 황제릉을 찾으려고 난징시 일대와 단양 등지의 허허벌판에서는 기껏 빌린 택시가 어제 내린 비에 도로가 진창길로 바뀌어 진흙에 바퀴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송나라 황제릉은 다 찾아가 보았는데 드넓은 밭 가운데에 뻘쭘하게 서 있는 송황제릉의 석물은 부지런한 농부들 때문에 흙이 패여 위태롭게 보였다.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이민족의 황제릉은 관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가 봐도 남아 있는 것은 파헤쳐진 구덩이뿐이어서 한없이 심란했다. 그야말로 중국 황제릉을 답사하는 일은 모험과 고난과 회한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충실한 왕릉관리와 찾아가기 쉽게 배려한 이정표와 표지판 설치에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지금은 중국도 표지판이 하나씩 생겨 훨씬 나아졌지만 20년 전만 해도 국보급 유적이 있는데도 어떠한 표식조차 없었다. 멀쩡한 큰 길에서 삼거리가 나오면 이정표가 없어 어디로 가야할 지 멘붕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몇 번이나 왕복을 했으나 물어볼 사람이나 인가도 없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지난 5,6년 사이 중국도 많이 변하여 지도에 표시도 하고 관광시설을 갖추어 답사하기가 훨씬 나아졌다. 심지어 2010년대부터는 내비게이션에도 일부 황제릉이 표시되어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다시금 중국 황제릉을 답사하던 30대를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20여 년 전에 중국에서 기차표를 사는 것은 살인적인 상황으로서 역에 가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 있고 암표와의 전쟁도 치러야 했다. 만원버스를 타면 사람들 사이에 끼여 숨 막혀 죽을 듯한 공포도 체험하였다. 그나마 튼튼한 다리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던 여정에 하룻밤 10위안 내지 30위안 하는 초대소에서 자기도 하고, 거리에서 1위안 짜리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중국의 현지인보다 훨씬 많은 곳을 여행하고 답사하며 용케도 잘 견디었다. 그렇게 생고생을 하며 찾아 다녔던 그때 그 시절에 찾아간 그 황제릉들이 더욱 기억에 남고 또 다시 가고 싶다. 갔던 곳을 무엇하러 또 가느냐고 하겠지만 사실 같은 곳이라도 그 때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어떤 곳은 많게는 다섯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베이징, 시안, 뤄양, 선양, 난징 등지는 몇 번이나 가고 또 갔다. 어떤 때는 기껏 황제릉을 갔는데 수리 중인 경우도 있어 다시 가야 한 것이다. 2010년 난징의 명효릉에 갔을 때 제사를 지내는 향전(享殿)이 공사 중이어서 또 가야 했다. 2011년 베이징 인근 황제릉의 설경을 보느라, 근래 드물게 춥고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고 2012년 12월에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에 실은 사진은 같은 곳이지만 몇 년 간의 시차도 있고 계절이 다른 도판을 싣게 되었다. - (중략) -
황제릉을 답사하면서 능의 주인공인 황제의 자세한 행적을 살펴보면 황제는 좋던 나쁘던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그가 누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인민을 잘 먹이고 잘 살게 하기 위하여 밤을 새워 국사를 돌보던 모범생 황제가 있는가 하면, 백성의 고난을 직접 돌보고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인 황제도 있으며, 부왕의 후궁을 넘보고 백성을 전란에 몰아넣은 황제뿐 아니라, 사람이 저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망나니 같은 황제, 89세까지 장수한 황제와 불과 2살 때 요절한 황제도 있고, 61년간 재위했던 황제가 있는가 하면 즉위한지 불과 반나절 만에 나라가 망하여 가장 짧은 기록적인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도 있었다. 어떤 망나니 황제릉에 갔을 때는 발로 무덤을 밟아주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이고 인간사이며, 황제릉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갖지 않기로 했다.
나의 황제릉 답사와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평생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2000년 경부터 중국에서 황제릉 연구의 붐이 일어 연구자들도 많아지고 관계 서적도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학자로 양관(楊寬), 유의(劉毅), 송대천(宋大川), 황렴(黃濂), 악남(岳南), 호한생(胡漢生) 등 여러 연구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저서는 나에게 황제릉에 대한 시야를 넓혀 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서적은 베이징 같은 대도시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하여 그 지역에서만 판매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나라 황제릉 관련 서적을 사려면 일부러 하얼빈과 아청까지 가야 했다. 그 사이 하남성, 섬서성 문물고고연구소 등지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수준 높은 보고서들을 발간하여 황제릉 관련 지식을 바로 잡아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릉 답사를 비교적 무난하게 또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금의 이 책을 펴낼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30대에는 젊은 혈기로 무서움도 없이 드넓은 대륙을 혼자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만용이었다. 그러나 40대 이후 50대에는 팀을 이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황제릉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중국 문물연구소의 潘선생이 있다. 그는 평생 해왔던 고고학 발굴조사의 경험으로 황제릉에 관한 여러 정보를 알려주었고, 동행을 하거나 함께 하지 못할 경우에는 전화로 원격 조종하여 길을 찾아 주곤 하였다. 다음 조선족 출신의 중국인 全正煥소장이다. 그는 중국에서 문화 관련 공무원으로 근무하였고 현재도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원하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보를 제공해주며 황제릉 연구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한편 홍익대학교 조각사 전공의 兪聖雄선배는 여러 모로 보물 같은 존재이다. 중국 황제릉이나 북한의 고려왕릉을 연구할 때마다 많은 것을 해결해 주었다. 해박한 역사 지식과 탁월한 지리 감각으로 쉽게 가보기 어려운 대륙의 여기저기를 답사할 때 내 집처럼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팀을 이루지 않았다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그 많은 황제릉을 답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9년 8월에 명 13릉을 처음 답사했기에, 2019년 8월에 이 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하고 쓰고 고치다가 코로나 19에 마무리 짓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새 3년의 세월이 또 훌쩍 지나버렸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하지만 2022년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어서,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여 지난 30여 년간 은허로부터 청 푸이황제까지의 족적을 여기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책이 중국 역사나 중국 황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참고가 되고, 미지의 곳에 숨어 있는 역사에 관심을 갖고 답사하길 좋아하는 이들에게 작은 경험담을 들려주었으면 한다. 워낙 광대한 시기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묻힌 황제릉이라는 분야를 작은 책자에 담았는데, 모쪼록 부족한 이 책자를 통하여 광대무비한 중국 문화의 이해와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느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