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이름:박현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70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

최근작
2025년 3월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굴비

잘 있습니다 그대도 잘 있으십시오.

김남주 시 연구

[ 저자서문 ] 기억이 조작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의 뇌가 영악한 탓에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반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은 오래 지닐 뿐만 아니라 덧칠해져 감동과 흥분이 몇 배로 팽창되도록 한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김남주 시인의 이름을 최초로 들었던 것은 1988년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해였다. 같은 학과 선배가 기거하던 방에 놀러 갔다가 책장에 꽂힌 두툼한 시집 한권을 집어 들었는데 그 시집의 제목이 '조 국은 하나다'였다. 도서출판 남풍에서 발행한 초판본 시집이었다. 최초의 김남주 시집은 ?진혼가?이지만 김남주를 세상에 떨친 것은 '조 국은 하나다' 이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꽃이 앞에 서서 적당히 식은 국수 면발을 빨아올리듯 단숨에 책장을 넘겼다. 그 때 읽은 시가 이것이었는지 그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창비에 실린 시를 보고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 보았다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나의 시를 보고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보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또는 전사가 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으면 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보람이고 나의 자랑이다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부분, ?조국은 하나다?, 97쪽) 장항선 기찻길을 따라 열리는 백일장에 출전하여 상깨나 타오던 나의 글 속에 곰팡이처럼 피어 자라나 나를 갉아먹던 사랑, 죽음, 슬픔, 영원, 번뇌, 고독 따위의 시어들과 결별한 것이 이 무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쇄용지로 손끝을 베었을 때, 그 찰나의 당혹스러움. 서늘하게 파고드는 종이칼의 이물감. 관념을 탈피하고 삶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의 희열과 슬픔을 처음으로 경험한 그 순간에 오늘과 같은 날이 올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김남주 시인을 실제로 만난 것은 1989년 5월 어느 날 밤이었다. 1988년 12월에 출옥한 그는 전대협 3기 발대식이 열렸던 모교 운동장에 연사로 왔다. 나는 선배들과 무리를 지어 운동장에 설치한 조명용 비계(飛階) 아래에 있었다. 야단법석을 치르던 그 와중에 시인이 무슨 말을 남겼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의 손을 잡고 싶다는 욕망에 대열을 벗어나 연단 아래쯤 있다가 물러서는 그를 가로막고 악수를 청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의 손이 컸는지, 두툼했는지, 거칠었는지, 그가 나에게 어떤 덕담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은 확실했다. 아니다, 이 기억 또한 왜곡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일상의 시간이 무참히 흘렀다. 다시 김남주 시인을 만났을때 그는 세상에 없었다. 그의 시집만이 책꽂이에 남아 있다. ?진혼가? 초판본을 어렵게 구했다. 그것이 시인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같았다. 변하지 않은 세상에는 그의 시에 리듬을 얹은 노래만 남았다. 나는 지금도 시인의 노래들을 잘 흥얼거린다. 내가 김남주 시인에게 시인이 되겠노라 약속했는지 기억이 없지만 나도 시인이 되었다.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김남주의 시를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저자의 궁금증은 다음의 질문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 타자의 담론에서 주체의 담론으로 건너가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김남주의 시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둘째, 김남주가 “시”라는 무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셋째, 김남주의 노동 시편들이 가지는 탈식민주의적 특성은 무엇인가. 넷째, 김남주가 구사하는 시어 및 형상화 기법의 특징과 그것을 통해 김남주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가. 여기에 책의 두 번째 꼭지는 김남주가 출옥한 이후에 출간한 텍스트를 살펴본 것이다. 세 번째 꼭지는 김남주의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가 어떠한 가를 살핀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시간들을 통해 나의 공포와 마주했다. 나의 분노와도 잠시 조우했다. 김남주의 공포와 분노와는 결과 질이 다른 감정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부끄럽기 그지없다. 김남주의 분노는 세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지였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절규에 겨우 밑줄 이나 치고는 그러했을 것이라고 소용도 없는 토나 달고 있는 처지라 니. 그늘 아래 누워서 세계의 모순을 다 아는 체 하며 흰소리나 지껄 여대며 사는 주제라니. 그래서 다시 부끄럽다. 앞으로도 부끄러울 것이다. 김남주가 없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독재자의 후예들은 노골적이고도 극렬하게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민족의 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는 대를 이어 지속되고 있다. 이제 노동 탄압은 제도권 안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져 소년 노동자들이 연쇄 적인 죽음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청년들의 나라는 ‘헬조선’을 넘어 ‘망한민국’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이토록 참혹한 모순의 현실이 바로 김남주를 다시 불러 세워야 하는 이유이다. 제가 낼 수 있는 가장큰 목소리로 김남주의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책을 내었다면 그것을 명패삼아 난장판에 뛰어들기라도 할 터이지만 나의 지위는 높지 않아서 이 책은 그런 용도 로는 별무소용이다. 그러나 하늘이 내게 주신 작지 않은 선물은 내가 글을 쓰고 사유할 수 있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주신 대로 받아 드러내어 다시 돌려드릴 뿐이다.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 2019년 6월 박종덕 쓰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自序 아스팔트 틈새기 순 올린 질경이 짓밟지 않고 눈 맞춘 그대 덕분에 나도 꽃일 수 있었어요 꽃 진 자리 마른 대궁만 외따로이 남았대도 꽃이었던 나를 부디, 잊지 말아요.

백석, 흰 바람벽의 근대를 투시하다

전근대와 근대가 혼효되던 1930년대 백석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이 궁금증이 백석을 애모하게 만든 계기이다. 근대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대를 지향하지 않았고 근대의 비판에 매달리지 않으며 사라져가는 기억을 무연히 던져놓은 백석의 시적 독특함,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고담하고 소박한” 한 사발의 국수처럼 깊고도 오랜 울림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백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 백석은 가만히 앉아서 흰 바람벽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럼 백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나는 백석의 맑은 얼굴에서 그가 흰 바람벽을 응시하며 품은 초근대적 욕망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백석, 흰 바람벽의 근대를 투시하다』라고 지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근대를 뛰어넘고자 하는 백석의 욕망을 말할 것이다.

붉은 반함

느릿느릿 사막을 건너는 낙타 똑같은 보폭으로 줄을 잡고 걷는 상인商人이 있어 두려움 없다 절대 암흑의 시간 함께 그림자 겯고 건너줄 이 누구 나의 죽음을 슬퍼할 이 오직 나.

이해인 시와 영성의 시학

이해인의 시에 대한 최초의 평문이 발표된 것은 [민들레의 영토]가 발간된 1976년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글이 발표된 이후 이해인의 시집이 소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이해인의 텍스트를 연구한 성과물은 제출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 문단, 즉 비평계가 이해인의 시집에 무관심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1984년부터 몇 편의 단평이 등장한다. 이것은 당대 문단이 이해인의 시집을 일종의 베스트셀러 현상으로 수용한 이후에야 이해인에 대하여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해인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자의 무관심은 최근까지 이어져 있다. 당대 문단은 이해인의 ‘시’보다 시를 쓴 ‘수녀’ 이해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신분이 가톨릭교회의 수도자, 즉 수녀였기 때문이다. 한국 문단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수녀 시인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흔히는 대할 수 없는 성직 수녀의 정성어린 시”라는 추천사에 이미 이해인 신화는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흔히 대할 수 없는”은 “성직 수녀”를 수식하기도 하지만 ‘성직 수녀가 쓴 정성어린 시’를 수식하기도 한다. 성직 수녀도 드물지만 성직 수녀가 시를 쓰는 일은 더 드물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수녀’라는 기표는 이중적이며 그 간극이 매우 크다. 환언하면 이 기표는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히 유효하였으나 이해인의 텍스트를 미학적으로 독해하고 분석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수녀’ 이해인이 ‘창작한’ 시집 [민들레의 영토]이후 형성된 최초의 독서 습관이 고착화되어 이해인의 시를 폄하하는 근거로 작동하였음도 지적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수녀’ 이해인의 시가 종교적임을 인정한다면 종교적 영성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양상 등 살피고 분석하여 이해인의 시적 특성을 구명해야 하는데 이러한 시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해인의 시를 ‘문단에서 인정하지 않고 문학적으로도 평가에 인색하다는 느낌을 많이 가지게’ 한 원인 중 하나는 이해인의 시를 예술적 텍스트로 인정하지 않고 ‘수녀’라는 기표로 텍스트를 덮어씌운 결과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녀님이 현실적 삶의 아픔을 아느냐, 수녀님 시는 맹물 같고 자장가 같다’7라는 비판을 하거나 ‘소녀 취향적 감성의 시’라는 다소 무례한 평가를 하는 이유도 이해인이 신분이 수도자라는 사실만을 강조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평의 초점 또한 이해인이 수녀라는 점에 집착한 나머지 텍스트 전체를 ‘구도(求道)’라는 프레임에 뭉뚱그려 꿰어 맞춘 흔적이 역력하다. 구도라는 주제에 집착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도에 이르는 이해인의 영성에 대한 점검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이다. 영성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이해인의 시를 너무나 막연한 종교시, 기독교 시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막연함은 그 논리가 성글어 이해인의 시를 아주 쉽게 보편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수녀여서 시가 돋보인다”는 왜곡된 시선은 이해인의 시에 대한 온당한 평가를 저해하였다. 사실 이해인의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영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거의 단평은 이 영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독서였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대단히 성글게 이해인의 텍스트를 편단하고 말았다. 이 책을 구성하는 여러 편의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타자의 시 읽기, 주체의 글쓰기

이 책의 제1부에는 다섯 편의 논문을 실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주의의 시선으로 텍스트를 읽고 연구한 글이다. 그래서 제목을 ‘타자의 시 읽기’로 붙였다. 시를 쓴 이도, 그 시의 주인공인 여성도, 그 시를 읽어낸 나도 모두 타자이기 때문이다. 주체를 욕망하지만 쉽사리 그 틈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타자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욕된 일인가. 「김남주 시 읽기」는 김남주의 시선에 포착된 여성의 실체를 구명한 글이다. 이 논문 이전에 나는 석사학위 논문과 「김남주 후기시 연구」라는 후속 논문 한 편을 제출하여 김남주 시에 대한 전반적 특징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살핀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김남주의 텍스트에서 여성이 균열되는 양상을 전혀 살피지 못하였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김남주의 텍스트를 분석한 결과 여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 여성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남주가 스스로를 민중시인으로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위해 시를 쓴다고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남주가 호명하는 민중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박노해 시 읽기」는 『노동의 새벽』에 형상화된 여성 이미지에 대한 연구이다. 이 글은 중층적 억압에 노출된 여성이 노동자 시인의 시선에 어떻게 포착되고 형상화되는가를 살핀 글이다. 「이연주 시 읽기」는 매매춘 여성의 삶을 정면에서 호명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대상으로 매매춘 여성의 삶과 자본주의적 세계의 상관성에 대한 구명을 시도한 글이다. 「나희덕과 김선우 시 읽기」는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성 작가의 인식과 태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대응 방식을 나희덕, 김선우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살펴본 글이다. 「김혜순 시 읽기」는 지식인 여성 작가인 김혜순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여성 억압의 양면적 근원을 천착하고 그에 대한 작가의 대응 방식을 구명한 글이다. 제2부는 현장에서 글쓰기와 관련한 교과목을 강의하면서 천착했던 고민의 결과물이다. 대학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면서 가장 홀대하는 교과목이 글쓰기 관련 교과목이다.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그대로 노정하는 교육 현장의 현실은 참담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장사치가 매상을 기록하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장사치가 장사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한 행위이다. 글쓰기는 사유의 총체요, 철학의 현현이다. 글쓰기를 학문의 출발이요, 끝으로 인식하지 않는 대한민국은 그래서 여전히 천박하다. 천박함의 끝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이다.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는 자는 영혼이 없는 귀신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2부의 제목을 ‘주체의 글쓰기’로 붙였다. 「시 ‘보기’와 영화 ‘읽기’」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중심으로 이 영화의 서사를 구축하는 불교적 상상력과 그 구현 방식으로서의 은유를 고찰한 글이다. 세계는 은유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적 은유를 읽는 것은 영화적 은유를 보는 행위와 같다. 시적 은유는 볼 수 있고, 영화적 은유는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읽기는 학습자들에게 글쓰기의 좋은 교본이 될 수 있다. 「현대시로 글쓰기」는 ‘아버지’를 소재로 한 현대시를 활용하여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한 글이다. 아버지를 노래한 시를 통해 아버지의 삶과 정서를 이해하고, 아버지와의 소통이 단절된 원인을 스스로 찾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사유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말하기’와 ‘글쓰기’ 통합 수업 설계」는 글쓰기의 교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합하여 수업을 설계하고, 이러한 절차를 준수한 교수 방식이 학습자들의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실제적인 효과가 있음을 증명한 글이다. 「영화로 글쓰기」는 영화 [박하사탕]을 활용하여 글쓰기 교과목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비평적 글쓰기 지도 방법을 사례화한 성과물이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