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출퇴근 시 또는 약속 시각을 기다리거나, 잠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짬 내서 읽을 만한 소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목적을 위한 소설이라면 톨스토이나 도프토옙스키의 장편들처럼 앉아서 작정하고 읽어야 하는 소설들이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처럼 몰입해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면 곤란할 것이다. 짧은 만큼 흥미로운 소재와 적당한 호흡으로 구성되어 쓱 읽고 치어버릴 수 있는 그런 소설이어야 한다. 더불어 삽화가 들어가 직관적인 상상력을 더할 수 있는 소설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내 첫 번째 소설집, ‘오리발 연금술사’는 이런 취지로 기획된 소설이다. 월요일 아침 집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읽을 수 있는 소설, 한가한 일요일 오후 컵라면을 끓이며 읽을 수 있는 소설, ‘미안한데, 한 10분 정도 늦겠어’라는 전화를 받고 바로 꺼내 읽을 수 있는 그런 소설 말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내가 중편이나 장편에 쓰려던 소설의 스케치를 엮은 소설집이다. 평소에 이리저리 끄적이던 스케치를 다듬어 단편으로 재구성했다. 덕분에 다양한 시도와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는 소설집이 되어 버렸다.
이런 목적으로 작성한 소설이다 보니 처음부터 삶에 관한 메시지나 거창한 인생의 통찰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독자들께서 재미있게 읽고 나서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이 책의 본분은 다한 그것으로 생각한다. 이 소설책과 함께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프롤로그
최근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 리플리를 봤다. 개봉한 지 20년이 넘은 영화지만 최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까닭이다. 이전에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 한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는 제법 각색이 들어가 있었지만, 이 작품은 원작을 더욱 충실히 재현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을 영화로 접할 때는 분명 영화의 시각적인 효과가 더해져 감정이입과 공감이 쉬워진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 할지라도 소설이 주는 감동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감독의 성향에 따라 상황이 재해석되기도 하고, 작품의 주제나 형성되는 분위기가 의도치 않게 굴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화 리플리에서는 원작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주변적 인물 피터 스미스 킹슬리가 재창조되어 극의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플롯 면에서도 주인공 톰의 첫 번째 살인이 의도적인 살인에서 우발적인 범행으로 바뀌는 등 감독의 입맛에 맞게 변경되는 경우가 있다.
단편 소설집 피넛 버터와 오후의 코끼리는 처음부터 영화화를 목적으로 기획되었다라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영화화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장편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면 장면의 생략, 삭제, 압축의 공정은 필수적이고, 2시간이라는 시간의 제약 속에 모든 요소를 적절히 녹여내야 하기에 마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자율성과 여유가 없어 스토리가 각박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관객에게는 순간의 느낌을 음미하거나 검토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지지 않고, 얻어지는 감동의 조절까지를 연출자의 의도 속에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피넛 버터와 오후의 코끼리와 같은 초단편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원작에 살을 붙이고, 문장 사이에 입김을 불어 넣어 공간을 만드는 각색이 필요할 것이며, 결론을 내리기 위해 추가적인 시나리오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량에 있어 여유가 있기 때문에 원작에 대한 감독의 해석과 의도가 영화의 핵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문학작품을 각색한 시나리오들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이와 같은 단편들은 얼마나 창조적으로 원작을 재해석했는가? 가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짧은 호흡으로 흘러가는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을 보면 이 책의 독자들은 ‘음, 그래서 이다음은 어떻게 된 거지?’ 또는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영화감독이 되어 나름의 각색을 해본다면, 새로운 해석을 더 해 색다른 결말을 만들어 본다면 더욱 흥미롭게 소설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훗날 피넛 버터와 오후의 코끼리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작품이 되서 CNN 문화부에서 특집 방송으로 저자와의 인터뷰를 기획하여 워싱턴 스튜디오에서 ‘그래서 이 소설의 결론은 무엇이죠?’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독자들의 해석에 맡기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 단편집이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