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는 왔다가 간다.
이번 시집을 만든 지난 3년여는 <유마경>을 읽고가 아니라,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엮은 기간이었다. 자아를 긍정해서 자아를 긍정하는 타인을 만나는 선(禪). 타인을 긍정해서 자아를 비우는 <유마경>. 이 속사정은 내가 때늦게 유마를 만났기 때문에 체득하게 된 것이다. '때늦게'가 아니었다면 저 무한 반복의 <유마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제 '유마의 병상(病床)'을 떠난다. 혹시 다음 시집은 예컨대 지금 읽다 던지고 읽다 던지곤 하는 들뢰즈를 제대로 읽도록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되지나 않을지.
4년 전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를 상재할 때 앞으로는 좀 건성건성 살아도 되겠구나 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늙음이 코로나 글러브를 끼고 삶을 링 위에 눕혀버린 것이다.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다.
이상하다.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어도 상상력은 시에서도 산문에서도 줄지 않고 더 끓고 있음을 느낀다. 이 일이 기쁨의 샘도 되고 괴로움의 물줄기도 되었다. 줄어드는 기억력 때문에 정말 조그만 것을 잊혀지기 전에 써놓느라 잠에서 깨어 몇 줄 끼적이고는 다시 잠들지 못하거나 맨 술의 힘으로 간신히 잠을 이어간 날을 어디 최근에만도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으랴.
손볼수록 시는 길이가 줄어들고, 손볼수록 산문은 부피가 는다. 산문 손보기는 화분에 물을 주다가 아 이 문주란이, 아 이 제라늄이 그동안 이렇게 컸나, 놀라는 느낌과 비슷하다. 화분을 간다면 모를까 더 커지면 곤란한데. 더 이상 묽어지지 않도록 위스키 잔에 얼음을 더 넣지 않기로 한 때처럼, 더 이상 부피를 늘리지 않으려고 애쓴 산문도 꽤 있다. 시인의 숙명이다. ('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