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정답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좋은 건축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되새겨보는 것은 그와 똑같은 걸 다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과거의 생각들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 책에 소개된 혁명적인 집들이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5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서울로 돌아오며 다짐한 게 하나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서울에서의 생활을 '여행하듯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보통 일상과 여행으로 구분되는 삶의 모습은
일상을 칙칙하고 우울한,
다시 말하자면 언제든 도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폄하하게 했다.
그리고 여행은 구원을 의미했다.
그런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일상을 탈출할 때 느끼는 희열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구원이라는 것이 오직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곳
을 제외한 다른 장소에서만 '잠시' 존재할 리는 없었다.
일상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건 일상이 여행처럼 매 순간 일탈과 느슨한 긴장의 연속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을 일상이지 않게 하는 것.
그건 삶 자체를 여행으로 인식하면 되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일상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귀국 후 카페를 오가며 가벼운 프리랜서 생활을 하던 시절을 지나
당장 생계와 연관되는 '일'을 갖게 되고,
그것에 대한 책임감에 얽매이자
여행하는 것처럼 살아보겠다던 나의 다짐은 금세 잊혔다.
샐러리맨 생활을 하는 친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고
덤으로 주말도 온전히 일했다.
나는 여유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의 삶에 순조롭게 적응하며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속도에 몸과 영혼을 맡겼다.
그리고 항상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견고한 일상의 틀 가운데서
잠시 카페의 구석자리를 찾아가
노트북을 열어놓고 있거나 스케치북을 꺼냈던 순간들이 있었다.
서울이나 건축에 관한 이야기들을 지면에 소개하도록 허락해준
많은 매체들 덕분이었다.
아무리 일상이 빡빡하더라도
원고를 쓰기 위해 사무실을 벗어나 보면
짧은 시간이나마 서울을 느슨한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은 그런 시선의 조각들을
다시 모아 첨가하고 정리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건축과 도시 이야기는
마치 화학 교과서의 분자 구조에 관한 내용만큼이나
지루하고 심드렁하게 들릴 수 있다.
(물론 분자 구조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딱딱한 정보의 이야기는 최소화하고
개인적인 많은 기억들을 덧붙여 서울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덕분에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구체적이면서도 지엽적인 서울의 몇몇 장소들에 대한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들이 난무하고, 애정과 잔소리가 뒤섞여 있다.
서울에 대해 깊이 있는 식견을 다룬 많은 책들은 이미 많이 존재한다.
다만 조금은 편안하고 일상적인 도시적 시선을 공유하자는 의미로
나의 부족한 이야기들을 용감하게 내놓아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울을 알아야 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단지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 책이 그런 행위들의 동기가 되어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생각보다는
즐거운 곳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마치
새로운 화학식을 찾아낸 과학자처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2012년 봄, 광화문에서
“이제 수많은 선택들이 앞에 놓인다.
선택을 위한 실마리나 도움은 거의 없다.
지도를 보며, 방향 감각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우연들이 난무하는 길을 무작정 떠나보는 것이다.
그곳에는 해답도 없다.
여러 페이지들을 거쳐가며
삶의 인자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려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전부다.
다만 모든 여정이 끝났을 때
전체의 대륙이 한눈에 보이는 지도를 펴놓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 을 본다면
예상치 못했던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누군가
자신만의 길을 만들 수 있기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도를 따라 국경을 넘어 다니며 유럽에서 대한민국에 이르는 육로 여정을 택할 때 나는 나의 전성기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냉정하자면 진짜 있었던 건지도 의문인, 모든 게 내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과거는 증명하려는 시도에 의해 남루해진다. 그렇기에 철도여행이나 대륙횡단을 권하는 마음으로 책을 쓰지 않았다. 너무 많은 채널을 가진 텔레비전 앞에서 정작 마음을 둘 만한 곳이 없어 이리저리 리모컨만 괴롭히다 우연히 멈추게 된 화면처럼 형체가 없는 시간의 일부를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법칙은 철도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것일수록 매력이 넘친다. 폐쇄된 간이역과 마지막 운행에 나선 새마을호, 녹슨 단선철로와 깜깜한 말발굽 모양의 터널 앞에서 흉물스럽다고 기겁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철도여행의 매력은 첨단 기술로 발전하는 과정에도 옛 것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기존 역사를 재활용하여 새롭게 탄생한 철도역, 사라져버린 열차의 이름을 달고 달리는 신형 전동차, 공원이 된 옛 철길,증기기관차가 달리던 길을 따라 달리는 고속열차. 우리 땅에는 사라진 철도가 적지 않다. 그 모든 기억을 소환할 순 없겠으나 가까운 미래를 낙관하며 여정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합된 한반도 철도 노선도를 그렸다.